2018년 한국의 문제작. 이창동 감독의 <버닝>입니다.
칸영화제 경쟁작으로 초청되었고, 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 그 시점의 흔적이라도 담지 않는 영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적극적으로 한국의 2017년, 그 시점의 청년세대를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를 둘러싼 논란 또한 2018년의 논의이고, 기록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일까요? 통일, 북한, 출산률, 페미니즘 등.
그 중에서도 단연코 공격적으로 이야기되며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과 같은 정치적 문제가 와닿는 온도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당장 나의 위치와 내 주변 사람들과의 사회관계와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로 느껴집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전개되는 양상은.. 성별대결구조, 특유의 비하적 개념화들, 미러링, 진영논리 등이 있겠습니다.
또한 모든 이슈들을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선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여성주의 전문비평가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전문가의 바운더리를 넘어 '대중'이 문화적 구성요소들을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버닝>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이 작품이 칸이라는 권위의 초청을 받았고, 그 영화제는 양성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매년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올해는 그 정점일수밖에 없었으며, 버닝은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은, 페미니스트 트위터리안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유아인.
안그래도 무수한 해석이 가능한 이 영화, 호불호가 극히 갈리고 다양한 비평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이 영화에 여성주의적 관점'들'을 포함한 여러 해석들이 흥미로운 비평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미지중심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볼 것이며, 나아가 다른 관점들의 비평들을 조망해 볼 것입니다.
1. 이미지중심적 관점에서
영화를 이루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서사와 이미지
물론 서사와 이미지는 서로 상호작용하고 결합하면서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분시키는 행위는, 하나의 평가기준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기준이 절대적이라고는 절대 말할 수 없습니다.)
이는 소설과 영화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한 영화를 평가하고자 할 때 서사에만 치중한다면? 시각/청각적 자극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미지의 측면을 무시한다면? 정당한 비판이라고 할 수 없겠죠.
이를 일단 편의상 '이미지중심적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해 '쓰는' 것이 불완전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지란 본질적으로 말로 완전히 표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마주친 것들에 대한 인상, 느낌 같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앞에 '막연한' 이라는 형용사로 그것을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변명하지만, 사실은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어는 인간 소통의 주요한 매체이지만, 그 역시 여러 매체 중 하나에 불과한 만큼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영화는 어떤 이미지를 그려냈을까요? 서사를 더한 의미를 획득하기 이전의 이미지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일차적 인식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서사와 이미지를 동시에 감상합니다. 따라서 이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이차적이며 작위적 인식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1) 빛 :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빛은 다양한 의미로, 절제되어 사용되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햇빛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빛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은 아마 해미의 북향 자취방에서 종수가 본, 남산타워에 비친 한줄기 빛일 것입니다.
어두운 벽에, 일순 생겼다 사라지는 한줄기의 빛. 어두운 곳이기에 그 빛은 더욱 희소한 것이 됩니다.
해미가 노을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는, 줄곧 영화에서 노을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노을은 하루 중 태양이 가장 '붉게' 보이는 시기이기도 하죠.
그저 밝게 빛나는 한낮의 태양이 아닌, 붉은 빛을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내뿜는 노을은 , 저녁의 하늘을 더욱 푸르고 시리게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종수의 강박적인 마을 순회가 잦아지면서 , 연출되는 배경들은 모두 노을이 생기기 직전, 또는 노을의 배경이 되는 하늘처럼 하나같이 푸르게 어둡습니다. 조명이 별로 없는 시골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김없이 긴장감을 조성하는 배경음악이 연출되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버닝' - 종수의 얼굴에 비치는 붉은 빛. 그리고 불타는 차. 마치 영화에서 아껴놓았던 순간처럼, 전반적으로 푸른 빛을 띠던 화면이 이글거리는 붉음으로 차게 됩니다.
(2) 춤 또한 주요한 이미지를 이룹니다. 해미가 추는 아프리카 부시맨들의 춤, 그리고 판토마임.
우리는 '흥'과 '리듬'을 표현하기 위한 춤에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춤, 또는 리듬이 없는 춤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런 춤의 감상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왜? 이건 대체 무슨 '춤'이지?
해미가 추는 춤은 이처럼 전형적이지 않은 춤들입니다(클럽 씬 빼고). 해미의 판토마임은 리듬이 없는 춤입니다. 뚜렷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있지만, 그것은 '사물의 부재를 잊는 것'이라는, 단박에 공감되지는 않는 방법론에 의한 것, 또한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을 앞에서 추는 '헝거'의 춤 또한 그렇습니다. 리듬에 맞춰 추는 것이긴 하지만 그 근원적 감정은 흥이나 즐거움이 아닙니다. 내면의 배고픔을 채우고 싶어하는 욕망, 의미를 갈구하는 욕망, 그 욕망이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을 아는 자의 비관적 몸부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춤들은 결코 말로 다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를 전해 줍니다. 우리는 그 움직임을 인식하고, 그곳에서 받는 인상을 가질 뿐입니다. 어쩌면 이 춤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그 춤을 그대로 추는 것이겠죠. 우리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상을 받기에, 춤을 통해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고 있는 감각을 느낄 뿐입니다. 그 외의 기호론적 해석의 시도들은 모두 부차적이며 주관적인 것들입니다.
빛과 춤. 이 두 주요한 이미지는 영화의 주요한 정서를 만들어 냅니다.
빛의 절제된 이용으로 인해 우리는 점점 버닝에 가까워지는 영화의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순간 순간 긴장감을 더해주는 음악은 고조되는 호흡을 느끼게 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정말 스릴러만을 노린 것이라면, 후반부를 더 쪼였을 것입니다.
또한 춤. 춤을 추는 해미의 이미지, 그리고 팬터마임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현대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어떤 감정,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감정의 이미지를 획득합니다. 팬터마임은 서사의 흐름상 기호론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노을과 함께하는 부시맨의 춤은, 사라지고 싶은 그녀의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이미지입니다. 어느 말과 서사로도 그러한 '영화적' 경험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만 영화를 평가한다면 별 5개를 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평가입니다. 적어도 대중영화에서는 서사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사를 통해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를 얻고, 이미지를 통해 서사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실 '이미지중심적 관점' 이라는 것은 단지 영화가 시각적 / 청각적 묘사를 통해 도달하는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사와의 결합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지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되어야 합니다. 서사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다음 파트에서 조망해 보겠습니다.
2. 다양한 시선들
해석의 여지가 정말 많은, 미스테리한 작품인 만큼 관객들은 정말 다양한 평을 내놓았습니다. 같은 영화를 본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영화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철학을 펴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들을 읽는 재미가 정말 (쏠쏠)
특히 왓챠에 가면 정말 여러 시선들이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건전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튜브에서도 여러 형식의 영화리뷰 콘텐츠들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름돋는 해석'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시선들을 접해본 것은 아닐 뿐더러, 그 모든 관점을 몇 가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제가 접한 것들을 몇 개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일단 영화의 다양한 메타포들, 무엇이 진짜인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스토리들을 나름대로 분석한 글들이 많습니다.
버닝에 이르게 된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는지의 진위의 검증부터, 각각의 캐릭터가 상징하는 것들,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수많은 분석들이 있습니다.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의미를 강구합니다.
누군가는 한 예술가의 탄생으로, 누군가는 이야기꾼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누군가는 '감정'과 '가능성' 에 대한 이야기로 이를 해석했습니다.
수많은 실마리들 중 몇 개를 골라 각자의 해석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석의 공유는 영화의 경험을 새롭게 하고, 이미지를 확장시키도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해석들의 공통점이 모두 이 영화와 이창동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슨 , 여러 메타포와 미쟝센을 통해 의미의 지평을 넓혔다는 것인데요.
그것들이 어떻게 적절하게 쓰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그것들이 세련되게 잘 쓰였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찬사들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요.
모호한 영화, 기호학적으로 사람들에게 분석을 요망하는 영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는 두뇌싸움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좋은 선물이자 예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또 다른 시선은 여성주의적 관점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유아인이 주연이라는 것,
하나는 이창동이 캐릭터와 서사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유아인이 나오기 때문에 그 문제적 인물에 대한 보이콧의 일환으로 영화를 보지 않고 평균 별점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소위 '별점테러'에 이른 것은, 이창동이라는 감독이 수년간 영화를 만들어 오며 보여주었던 남성주의적 시각과, 그것이 8년 만에 나온 신작에서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정당화됩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여주인공 해미는 그저 벤과 종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서 소비되었을 뿐입니다. 청년을 다뤘다고 하는 영화에서 왜 해미는 단독 씬도 부여받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지냐는 것이지요. 이창동이 항상 여자주인공을 불쌍하게 바라보고, 죽임으로서 남주의 스토리를 완벽하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여성의 시선이 절반을 이뤘던 이번 칸 심사위원단이 버닝에 상을 주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구,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이루어졌던 주류 비평계와 시상식이 새로운 시선을 담지함으로써 , 그들의 시선에 맞는 영화가 밀려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3) 그 외 지나치게 서사가 모호하고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는 혹평이 있습니다.
3. 시선들이 이루는 장
특히 위 (1)과 (2)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사실 (2)의 여성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논쟁을 일으킵니다.
일단 위의 비평들은 서로 타당성을 겨룰수는 있지만 결론적으로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판결할 수 없는 것이겠죠. 관점 차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있으니까요.
어느 관점을 가지느냐까지도 문제삼으며 논쟁한다면, 그것은 이미 작품을 넘어 사회에 대하여, 인식의 틀에 대하여, 정치적 입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논의는 결론적으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장은 서로 날을 세우고 대치하고 있지만
서로의 의견이 표출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바로 영화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고, 특히나 <버닝>같은 작품은 해석의 여지를 일부러 많이 심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거리, 여러 각도에서 여러 문제에 이 영화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을 본 사람은 이 해석의 장에 참여하여 사람들이 어떤 토대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왓챠에서 본 인상적인 댓글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실 비평가들은 누구보다 취향이 강한 사람들이고,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비평가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변호하고 대중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할 뿐이라고.
그 취향의 정당성에 대해서까지 캐묻는 것은 예술의 주요한 사회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나치게 헐뜯어서는 안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