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코는 항상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는다. 

1. 사회의 암적인 존재 혹은 벌레취급을 받는 아웃사이더의 내면을 대변하다.  

18세기 유럽의 '로코코' 풍을 지향하는 여고생 모모코. 모모코는 쾌락과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화려한 그 시대에 태어나고 싶었다. 모모코의 몸과 마음은 모모코가 사는 시골 마을(시모츠마)에 있지 않다. 도쿄의 디자이너샵에서 산 비싼 프릴 원피스만 입는다. 머리장식과 가방, 양산도 완벽하게 매치한다. 항상 혼자 다니며 달콤하고 예쁜 음식만 먹는다. 학교에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체육시간에 참여하지 않는다. 혼자 걸으며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상상을 자주 한다. 

은근 세상에 이런 사람 많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세계에 꽂혀 사는 사람들. 웬만하면 관계맺지 않는다. 왜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걸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만의 이상 혹은 공상을 갖고 살아가겠지만 그걸 드러내는건 쉽지 않다. 하지만 모모코 부류의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성 없다고, 공동체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비난받는다. 손가락질 당한다. 

그런데 손가락질하는 그 다수는 모모코보다 더 나은 인간인가? 모모코의 시선과 내면의 소리를 좇는 이 영화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모모코는 행복이 뭔지 안다. 본인이 무엇을 할때 행복해지는지 안다. 어린 나이이지만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집중할 줄 안다. 행복을 붙잡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안다. 커서 뭐가 될거냐는 친구의 물음에 "글쎄, 노동은 취미와 맞지 않아서" 라고 (한심한,,) 대답을 하지만, 본인이 잘 하는 일(자수 놓기)을 통해 당당히 돈을 벌기도 한다.

반면 자신의 내면은 방치해둔 채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맞춰 사느라 삽질하는 사람들은 어떤가?(바로 나) 한번이라도 내면의 소리, 내가 무엇을 할때 진정 행복해지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나같은 사람이 모모코류의 사람들보다 생산활동에 조금 더 참여하고 조금 더 번다고 해서 모모코류의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래선 안된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이치코는 여고생 폭주족이다. 

2. 하지만 아웃사이더에게도 관계맺음이 가능하다. 친구라는 존재는 아웃사이더가 몰랐던 행복을 알려준다. 

모모코에게 이치코라는 친구가 나타난다. 까만 립스틱에 발목까지 오는 치마. 화려한 스쿠터를 타고 담배를 핀다. 모모코만큼이나 비주얼이 과하다. 이치코는 매일 모모코를 찾아온다.  모모코의 아싸 기질이 본인과 통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둘의 차이가 있다. 모모코는 본인이 동경하는 세상이 현실(2000년대 초반 일본)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아싸가 됐다. 즉 주어진 환경이 로코코였다면 모모코는 아마 인싸였겠지. 하지만 이치코는 주어진 세상에 반항하는 방식으로 아싸가 되었다. 로코코에서 태어났어도 이치코는 아싸다. 

그래서 모모코에겐 중심이 있다. 표정 변화도 감정 동요도 없다. 길을 걸을 땐 항상 똑바로 간다.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반면 이치코는 흔들린다. 정신없고 불안하다. 감정기복이 심하고 요란하게 스쿠터를 탄다. 불안하고 외로운 이치코는 친구를 원하기 때문에 모모코에게 매달린다. 같이 있고 싶어하고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결국 엔딩에서 모모코는 이치코와의 함께한 사건 후에 진짜 시원한 미소를 보여준다. 잇몸을 다 드러낸 상쾌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니까 자기 세계만 보고 사는 아웃사이더에게도 관계맺음이란, 친구란 불가능하지 않은 거다.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와 관계맺음으로써 자기만의 행복의 정의에 없었던 새로운 행복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Bonnie and Clyde>. 1967. 

한글 제목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감독 아서 펜(Arthur Penn). 주연 페이 더너웨이( Faye Dunaway), 워런 비티(Warren Beatty)


아래 글은 로저 에버트(Roger Ebert)의 영화 개봉 당시 리뷰를 번역한 것입니다(1967. 9. 25 작성).


(원문 : https://www.rogerebert.com/reviews/bonnie-and-clyde-1967)




<Bonnie and Clyde>(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진실과 천재성으로 만들어진 작품, 미국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영화는 무자비하게 잔인하고, 연민으로 가득하며, 구역질나고, 흥미로우며, 가슴 아프고, 또한 놀랍도록 아름답다. 형용사들이 한데 묶이는 것이 모순으로 보인다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한 작품 안에서 인간 삶을 총제적으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드 배로(워런 비티 역)와 보니 파커(페이 더너웨이 역)가 그 '인간 삶'을 대표한다. 이들은 은행강도와 살인으로 신문에 얼굴을 싣는 양아치다. 은행을 터는데는 소질이 없으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며, 신문 등장하는 것에는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보니는 씹는 식당 종업원이었고, 클라이드는 가석방중인 하찮은 깡패였다. 그런데 이들은 예능인이기도 하다. 범죄자로 이름을 날린  보니는 클라이드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작시 함께 언론에 보낸다. 자신들을 대공황 시기 암울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의 통쾌함을 선사하는 공인으로 생각한다. 


"굿 애프터눈, 배로 갱이다(Barrow Gang, 보니와 클라이드의 강도단)" 클라이드는 은행에 들어서며 인사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는, 미국 역사상 이뤄졌던 모든 폭력들을 종합하여 대중매체에 터뜨려준 선구자라고도 있겠다.


아서 (Arthur Penn) 감독한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똑바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겨냥한다. 영화는 명백하게 오락을 목적으로 대중영화이고, 관객은 분명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린 커플들은 <특공대작전(The Dirty Dozen)>(1967), <타고난 패배자(The Born Losers)>(1967), <지옥의 천사(Hells Angels on Wheels)>(1967)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개봉 당시 미국 10 사이에서 유행했던 B급영화들 -  대하는 것처럼  작품을 보며 영화관 데이트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통의 B 영화들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영화에서 폭력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피를 흘리지 않는다(현실성이 없다).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지만,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다. 살인 장면은 영화 구성에서 내키지 않아도 다뤄져야 요소 같은 것이 되어, 관객들은 그래야 표값을 한다고 생각한다. 섹스신도 마찬가지다. 마치 과자봉지 장난감 같은 것이다. 전혀 쓸모가 없는데도 혹시나 들어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사기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는 진짜 사람들이 죽는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 소름끼치게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괴로워하기 직전 웃고, 체스를 두고, 사랑을 나눈다. 영화 속 희생자들은 우리가 아는 평범한 주변인들이 되고, 그들이 죽을 때, 객석에서는 전혀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을 , 그들은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난다. 충격적이다. 만화 <Fearless Fosdick>에서의 묘사처럼, 총알은 사람의 몸에 깨끗한 치즈 구멍 같은걸 남기는게 아니다. 총알은 실제로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뚫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살인의열풍시대에 살고 있다. 연쇄살인마 리처드 스펙(Richard Speck, 1966 7 13일과 14일에 8명의 견습 간호사들을 고문, 강간, 살해) 포스터가 팔리고, 뉴아크 소요(Newark Riot, 1967년 뉴아크 백인 경찰의 지나친 흑인 진압에 대한 시위) 당시 경찰 스나이퍼들이 라이프(Life magazine) 표지에 실린다. 폭력은 비인간적인 자질을 요구하게 되었다. 배로 갱은 스크랩한 신문의 구절을 재밌다는 듯이 크게 읽는다. 갱단의 일원인 모스가 총상을 입은 보니와 클라이드를 아버지 집에 데려갔을 , 아버지얘네가 위해 해줬냐? 신문에 넌 이름도 나왔어라고 조소한다. 이것은 유머인가, 비극인가? 


흠잡을 없는 연기. 페이 더너웨이 워렌 비티 이 작품에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주연급으로 자리잡았다. 갱단의 드라이버이자 수리공인 C.W 모스 역을 맡은 마이클 폴라드는 사람좋은 바보의 유머와, 진실된 감정연기를 선보인다. 보니가우린 은행을 털어라며 갱단을 소개하고 그를 동료로 들이려  , 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몸의 움직임은 완벽하고도 기분 좋은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또다른 멤버들 배로(Gene Hackman 핵맨, 클라이드 배로의 ) 블랑쉬 배로(Estelle Parsons에스텔 파슨스) 부부는 엉성하고, 단순하며, 선량하기까지 하다. 벅과 클라이드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딱히 말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얼싸안고 장난스럽게 주먹질을 주고받는다. 경찰의 함정에 걸려 갱단이 총격을 받고 벅이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 블랑쉬는 도주하는 갱단의 안에서 미친 듯이 높게 울어 제낀다. 이는 나에게 지옥의 적확한 묘사로 느껴진다. 


이것은 단연코 올해(1967) 전미 최고의 영화이다. 또한, 기념비적이기도 하다. 후에 분명히 영화는 1960년대의 슬픔과 유머, 그리고 공동체가 겪어온 것들을 낱낱이 보여주는 최고의 영화로 자리잡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1930년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어느 시점이든 선택할 있고, 중요한 것은 지금의 우리에 대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노트북>(The Notebook, 2004) 감독 닉 카사베츠, 주연 라이언 고슬링 레이첼 맥아담스 

"What do you want! what do you want! what do you want !?! god damn what do you want?!"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여러 명장면을 남긴 로맨스영화. 연인이 함께 보기 좋은/시간때우기 좋은 영화목록에 꼭 포함되는 반열에 올랐습니다. 


관람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극과극입니다. 

한 편에는 첫사랑의 기억, 진정한 사랑을 담아낸 '인생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한 편에는 도저히 주인공들에게 이입할 수 없으며, 이를 행복한 사랑으로 그려낼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 더 전문적인 영역인 비평가들의 평가는 이 영화의 명성에 비해 많지 않습니다. 

대중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중적 영화라 평론가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 평론가는 이 영화의 전형적 '신파'와 그 신파로 인해 영화의 '바이블'로서의 위치가 굳어진다는 짧은 평을 내렸습니다.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은 크게 두 가지, 등장인물들 각각의 입장과 영화가 그려내는 '첫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입니다. 

평론가가 주목한 것은 '전형적 신파'로 , 바꿔 말하면 '서사'의 문제입니다.

관객들이 작품의 텍스트에 주목했다면, 평론가는 로맨스영화라는 장르에서 이 영화의 위치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일반적인 관객/비평가의 감상태도입니다) 

이 두 가지 일반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지만, 이 글에서는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서사' 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서사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관객들이 작품 자체의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더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중영화에서의 서사란 필연적으로 그 시점 대중들의 의식, 관념, 문화 등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서사'


영어로는 내러티브(narrative).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완결된 하나의 스토리, 또는 흐름을 지칭합니다. 

이는 아주 특수한 경우부터 보편적인 경우를 모두 포괄합니다. 

특수한 경우라면 '<매트릭스>의 서사구조' 와 같은 예시로 쓰이고, 

보편적인 경우라면 tv드라마에서 자주 발견되는 '신데렐라 서사'와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좀 다른 의미와 무게로 쓰이는 단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위 정도의 의미를 가져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서사를 보면, 우리는 일단 소설이라는 아주 오래된 문학 장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영화보다 훨씬 그 역사가 긴 소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발전되어 왔는데요, 

이 과정 속에 크게는 '비극' '희극' '로맨스서사' '영웅서사' 부터 '신데렐라서사' 까지 다양한 서사들이 존재합니다.

같은 서사를 가진 것으로 판명된 작품들은 비슷한 사건의 흐름 구조, 비슷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화'라는 것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이야기들의 모티브, 원형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인데요. 

어떤 입장에서는 이 모든 서사들을 낳은 원형이 신화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20세기,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19세기 말 영상기술의 발견 이후 많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 기술을 통해 여러가지 표현을 시도했고, 많은 똑똑한 사람들은 영화의 존재론적 의미와 예술로서의 지위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영화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영화가 다른 기존 장르들과 공유하는 매체와 절차들입니다. 

음악이 그러하듯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연극이 그러하듯 연기와 배우를 필요로 하고, 회화가 그러하듯 시각적 구성이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설이 그러하듯 스토리를 가집니다. 

때문에 영화 역시 '말'과 '글'로 표현될 수 있는 서사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의 역사가 짧다고 해서 영화서사의 역사가 짧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영화 자체의 흐름은 소설의 흐름보다 훨씬 빠르지만, 기본적으로 극영화를 위해서는 글로 쓰인 스토리가 필요하기에, 그것은 소설이 구축해 온 서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장르와 서사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분석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비평과 영화의 위치 


사람들은 원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플랫폼의 발전으로 더욱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영화만을 위한 어플리케이션/사이트 이뤄지는 짧고 긴 평가들, 유튜브를 통해 이뤄지는 분석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훨씬 대중적으로 읽히는 것은 단연 동영상컨텐츠입니다. 

수많은 '영화 리뷰 유튜버' 들이 영화를 분석하고 심지어 중요장면만 편집하여 결말까지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하고 있는 비평은 텍스트분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작품 자체만 바라보며 등장인물과 미쟝센의 의미를 분석하고 사람들에게 나름의 추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분석은 분명 중요한 비평이고, 그를 바탕으로 더 넓은 담론을 펼쳐갈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영화 자체 텍스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있는 관객들이 처한 담론적 시대적 상황, 영화가 몸담고 있는 장르나 어떤 카테고리 등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더 넓은 카테고리' 중 하나가, 영화가 담지하는 특정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플롯이 매우 독창적이지 않다면 영화는 일정 서사에 기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서사를 전복하거나, 그 서사를 조금 비틀거나, 서사에 기대어 흥행을 노리기도 합니다. 

( 서사와 병치되는 카테고리들 중 하나는 영화의 민족성입니다. 한 영화가 어느 국가, 어느 감독, 어느 나라의 장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 등입니다 ) 



'전형적 신파'


이때 어느 평론가가 <노트북>에 대해 이야기한 '전형적 신파'가 다시 떠오릅니다. 

신파라는 단어는 매우 포괄적이지만 이 또한 하나의 서사입니다. 웃음과 눈물을 짜내는 서사..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형적 신파들, 그 중에서도 남녀관계를 다룬 영화들에서 <노트북>이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어째서 이 영화가 그 중에서도 '바이블'의 입지를 점유하게 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서사들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여러 서사들을 담은 아카이브를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입니다) 










 










<노트북>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평론가. 
  • 사랑이 어떻게 변하나? 문제. 
  • 이것은 사랑론인 동시에 영화 서사의 문제? 
  • 이런 장르에서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 전형적 캐릭터를 쓰는 것의 문제. 소설에서 영화로. 


소설원작영화 


소설, 서사, 내러티브 : 문학론에서 어떤 개념화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서사의 역사는 길다. ‘신화라는 원형도 존재한다. 


이때 영화는? 역시 서사를 가지나 역사는 짧다. 작품 한정적인 서사. 


작품을 평가할 , 영화가 몸담은 어느 줄기들/카테고리들을 떼어놓고 생각할 있을까? > 텍스트적 분석에 그치는


그러나 비평은 암호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비평은 예술에게 일정한 역할, 진보를 요구하고 따라서 그들이 몸담고 있는 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 그래서 <노트북> 대해서는 어떤 접근이 가능한가? ? ? 

  • 로맨스서사 / 할리우드영화 / 감독작품 / 소설원작 
  • 여기서 어떤 진보를 꾀해야 하는가? , 전통과 어떤 연관을 맺고 나아가야 하는 걸까? ... 
  • 전통과의 연관, (사론?) 에서 장르들 (소설 , 영화...) 등이 맺어야 하는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걸까? 

로맨스서사 - 너무나 방대한서사.. 다양한종류와 다양한인물 젠더문제 계급문제등등등등등등등

또한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어떤장르이든 흥행필수요소? 처럼 여겨지는 .. 

아무튼 이런 필수요소가 장르적 중심이 : 영화의 분위기. 이미지 형성 ..  


<오션스8> 2018, 감독 게리 로스





몸값 이름값 높은 배우들이 대거 등장합니다. 헬레나 본햄 카터, 산드라 블록, 케이트 블란쳇, 앤 해서웨이, 리한나...


화려한 출연진에 비해 별 것 없다는 평가도 많지만,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아이콘의 출연, 그리고 여성들로만 이루어진 팀이라는 장르적 개척은 


지금 우리 사회의 구조에 가장 큰 토론거리를 던져주고 있는 페미니즘에 대해 생각해 볼 여러 지점들을 제공합니다. 


대한민국의 20대 여성으로써 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을 갖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저의 능력 부족으로 아직...


그래서 이 글은 어떤 영화가 어떤 화두들을 던져주는지만 짚어보는, 부족하고 불완전한 메모에 그친다는 점을 미리 밝힙니다. 






1. 장르의 여성주의적 전용


여성으로 이뤄진 범죄집단을 소재로 한 것이 단순히 새로움만을 위한 것이 아닌, 어떤 여성주의적 시도임은 명백합니다. 


Ocean's 숫자 시리즈가 지금까지 남성을 중심으로 한 그룹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데비(산드라 블록)의 한마디가 크리티컬합니다. "남자가 끼면 남자만 주목받고 여자는 무시받아. 남자는 안돼"  


그래서 팀은 모두 여성이고, 각자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거침없는 팀웍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단순한'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때,  이런 시도가 이뤄졌다는 것 자체에, 그리고 케이트 블란쳇이라는 인물의 어떤 아우라에만 찬사를 보낸다면


중요한 지점들을 놓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시도가 처음인 것도 아닙니다. 여러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리고 수많은 여성주의 인디영화에서 땀흘려 일궈왔던 성과들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제가 아직 평가를 내리기엔 부족한, 그런 지점들을 몇 가지 짚어 보겠습니다. 





1) 여자화장실 전략 : 


목걸이를 훔치는 작전의 가장 핵심 장소인 여자화장실. 


이 장소를 사각지대로 사수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이 집중됩니다.


그러나 의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곳, 까르띠에의 건장한 보디가드들은 당연히 이 곳을 수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출입을 무력 저항 없이 막은 것은 데비의 당당함, '여자화장실이야!'라는 말의 반복입니다. 


결국 가드들은 침입하지 못하고, 핵심 범행 현장을 당연히 놓치게 됩니다. 


'여자화장실' 이라는 말의 힘은 무엇일까요.


이는 도둑들이 남성들에게 '젠틀맨'이 될것을 요구하며 , 'lady'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례입니다. 


남성을 배제한 도적단의 핵심 전략 중 하나가, 기존의 성별구조를 활용했다는 점은 생각해 볼 만 합니다. 


어느 상황에서도 남자는 여자화장실에 들어와서는 안된다. 'gentleman' 이 되라는 요구는 여성에게 정숙할 것을 요구하는 것 만큼 억압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을 어떤 식으로 바라볼지는, 각자가 서 있는 여성주의적 입장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2) 다프네 클루거 : 이중성의 전략


이 영화에서 대놓고 '이중성'을 담지하는 다프네 클루거, 그녀는 사회적으로는 기억력도 나쁘고 외모에 대한 집착과 질투에 넘치는 아름다운 여성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런 이미지를 제대로 연기하여 자신을 파는 똑똑한 여성이죠. 'I love my job!'


또한 '바비인형같다'는 말에 발끈하면서도 좋아하는 그런 면모들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인물을 극의 중심에 놓는 전략이 어떻게 읽힐지 역시 여성주의적 입장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1)의 문제와 연결되어서, 사회적 억압으로 작용하는 여성성을 이용하여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여성을 제시하는 것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2. 여성과 아름다움 



<오션스8>의 카메라가 비추는 여성들과 보석들, 그것은 너무나도 전형적인 광고의 앵글을 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오늘날 광고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온갖 새롭고 다양한 시도들을 하지만


보석, 악세사리를 아주 느리게, 그 빛을 강조하며 관능적인 음악과 함께 보여주는 것, 


'패션 포르노'라는 비평처럼 , 온갖 색으로 개성있게 꾸민 주인공들을 패션쇼의 인물들처럼 카메라와 눈을 마주한 채 당당하게 걷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여기서 저는 순간 옷과 보석이 주인공이 되는 광고의 이미지들을 보았습니다. 


이 이미지들과, 그것들이 물신화되는, 아직 존속하는 어떤 사회적 욕망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물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볼거리를 빵빵하게 제공해야 하는 영화로써 그런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것은 불가피했겠지만 


아름다움이란 결국 비싼 보석과 같은 것, 또는 런웨이나 레드카펫의 셀러브리티의 이미지와 같은 것일까요?


영화의 입장을 그런 것에 대한 비판으로 읽기는 조금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여튼 이 영화에는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걸려 있습니다. 


여성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은 완전히 타파되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절충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등등. 하지만 확실한 것은 어느 관객층이든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 영화가 페미니즘으로 이미 과열된 한국사회 논쟁의 장에 비추어 볼 때


오히려 너무나 미적지근하고, 어쩌면 그냥 킬링타임 케이퍼 무비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배드 지니어스> 나타우트 폰피리야 감독. 2017년 한국에서도 개봉한 태국영화입니다. Thai Film 이라고 한번 써보고 싶었습니다. 

국내외에서 여러 상을 받았는데요, 아시안 필름어워드에서 여주인공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이 신인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장르는 스릴러, 학원물 정도로 구분할 수 있겠고

스토리 흐름은 꽤나 전형적입니다. 

모호하거나 해석을 요구하는 장면들 없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태국 대중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두 개의 '전형성' 에 초점을 맞춰보고자 합니다. 


1. 이미지의 전형성

카메라의 앵글, 구도, 편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의 사물만을 짧게, 배경음악의 리듬에 맞게 보여주는 방식, 

긴장을 만들어가는 흐름 등이 너무도 한국 관객에게 익숙합니다. 

즉 이것은 새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다국적기업의 광고 이미지들, 팝 뮤직비디오의 영상, 한국드라마의 전개를 보았습니다. 

영화가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한 태국이라는 나라에 쏟아진 수많은 자본주의의 광고 이미지들은

영화 제작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영향이 여실히 드러난 것이 이 영화이고, 그래서 우리에게 전형적인 이미지들은 전혀 새로움이나 불편함 없이 다가옵니다. 


2. 등장인물의 전형성

자본주의의 몽타주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가난한 주인공들과 금수저 등장인물들의 모습이 교차되어 나타나는 몽타주. 

금수저들이 벌이는 파티는 너무나 전형적인, 서구에서 수입된 파티문화를 따릅니다. 

좋은 외제차와 맥북은 부의 상징으로조차 여겨지지 않을 만큼 전형적입니다. 

태국사회의 모습이 자본주의 어느 국가에서나 발견되는 모순을 전형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Thai Film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태국어를 쓰고, 태국 학교의 교복을 입는다는 것 빼고는, 이 영화가 태국만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태국영화의 전통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태국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꼭 태국만의 이야기를 담아야 하는가? 또는, 태국영화의 전통을 따라야 하는가? 태국영화의 전통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분명히 국가의 이름을 부여받는 '@@@영화'라는 전통은 존재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영화를 만들고, 그들의 것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라마다 그 전통이 형성된 과정은 매우 다를 것입니다. 평론가 정성일이 말하는 '아메리카 영화' 그리고 누군가가 너무나 사랑하는 '프랑스 영화' 한국의 '한국영화' 라는 구분이 가능해지게 된 배경, 과정은 전부 다릅니다. 

사실 <배드 지니어스>는 제 인생 처음 본 태국영화입니다. 그래서 태국영화라는 카테고리에 감히 함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태국에서 영화가 만들어진지도 100년이 넘었고, 그들의 영화교육, 위대한 태국 감독, 배우 풀, 영화에 담겨온 문화적 배경과 삶의 모습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태국영화의 전통이라는 것에서 <배드 지니어스>라는 , 국제적이고 전형적인 영화가 어떤 위상을 차지할지 판단하는 것은 아직 이르지만

태국의 영화이미지 제작과 사회구조, 계급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확실히 알려준 영화였습니다. 






2018 한국의 문제작. 이창동 감독의 <버닝>입니다


칸영화제 경쟁작으로 초청되었고, 상은 받지 못했습니다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 그 시점의 흔적이라도 담지 않는 영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적극적으로 한국의 2017, 시점의 청년세대를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를 둘러싼 논란 또한 2018년의 논의이고, 기록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일까요? 통일, 북한, 출산률, 페미니즘


중에서도 단연코 공격적으로 이야기되며 많은 사람들이 삶의 문제로 여기는 것은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과 같은 정치적 문제가 와닿는 온도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당장 나의 위치와 내 주변 사람들과의 사회관계와 관련된, 근본적인 문제로 느껴집니다. 


한국에서 페미니즘이 전개되는 양상은.. 성별대결구조, 특유의 비하적 개념화들, 미러링, 진영논리 등이 있겠습니다


또한 모든 이슈들을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시선들이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여성주의 전문비평가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전문가의 바운더리를 넘어 '대중' 문화적 구성요소들을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버닝> 역시 자유로울 없었습니다. 특히나 작품이 이라 권위의 초청을 받았고, 영화제는 양성평등에 도달하기 위해 매년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  올해는 정점일수밖에 없었으며, 버닝은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은, 페미니스트 트위터리안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유아인.


안그래도 무수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 호불호가 극히 갈리고 다양한 비평이 나올 밖에 없는 영화에 여성주의적 관점'' 포함한 여러 해석들이 흥미로운 비평의 장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이 글은 이미지중심적인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볼 것이며, 나아가 다른 관점들의 비평들을 조망해 볼 것입니다. 






1. 이미지중심적 관점에서




영화를 이루는 요소를 크게 가지로 나눠 있습니다: 서사이미지


물론 서사와 이미지는 서로 상호작용하고 결합하면서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이것을 구분시키는 행위는, 하나의 평가기준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이 기준이 절대적이라고는 절대 말할 없습니다.)


이는 소설과 영화를 구분할 있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영화를 평가하고자 서사에만 치중한다면? 시각/청각적 자극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이미지의 측면을 무시한다면? 정당한 비판이라고 없겠죠


이를 일단 편의상 '이미지중심적 관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지에 대해 '쓰는' 것이 불완전할 밖에 없는 이유는, 이미지란 본질적으로 말로 완전히 표현될 없기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마주친 것들에 대한 인상, 느낌 같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에 '막연한' 이라는 형용사로 그것을 이루 말로 표현할 없음을 변명하지만, 사실은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언어는 인간 소통의 주요한 매체이지만, 그 역시 여러 매체  하나에 불과한 만큼 한계를 지닐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화는 어떤 이미지를 그려냈을까요? 서사를 더한 의미를 획득하기 이전의 이미지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분석이 일차적 인식으로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 서사와 이미지를 동시에 감상합니다. 따라서 이를 떼어서 생각하는 것은 이차적이며 작위적 인식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1)  :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빛은 다양한 의미로, 절제되어 사용되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영화에서도 햇빛은 지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우리가 영화에서 처음 빛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은 아마 해미의 북향 자취방에서 종수가 , 남산타워에 비친 한줄기 빛일 것입니다


어두운 벽에, 일순 생겼다 사라지는 한줄기의 . 어두운 곳이기에 빛은 더욱 희소한 것이 됩니다




해미가 노을에 대해 이야기한 이후로는, 줄곧 영화에서 노을의 이미지가 등장합니다. 노을은 하루 태양이 가장 '붉게' 보이는 시기이기도 하죠


그저 밝게 빛나는 한낮의 태양이 아닌, 붉은 빛을 은은하지만 강렬하게 내뿜는 노을은 , 저녁의 하늘을 더욱 푸르고 시리게 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종수의 강박적인 마을 순회가 잦아지면서 , 연출되는 배경들은 모두 노을이 생기기 직전, 또는 노을의 배경이 되는 하늘처럼 하나같이 푸르게 어둡습니다. 조명이 별로 없는 시골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김없이 긴장감을 조성하는 배경음악이 연출되면서 영화의 분위기를 고조시킵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버닝' - 종수의 얼굴에 비치는 붉은 . 그리고 불타는 . 마치 영화에서 아껴놓았던 순간처럼, 전반적으로 푸른 빛을 띠던 화면이 이글거리는 붉음으로 차게 됩니다







(2)   또한 주요한 이미지를 이룹니다해미가 추는 아프리카 부시맨들의 , 그리고 판토마임


우리는 '' '리듬' 표현하기 위한 춤에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상대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 또는 리듬이 없는 춤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런 춤의 감상은 의문을 불러일으킵니다. ? 이건 대체 무슨 ''이지




해미가 추는 춤은 이처럼 전형적이지 않은 춤들입니다(클럽 빼고). 해미의 판토마임은 리듬이 없는 춤입니다. 뚜렷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있지만, 그것은 '사물의 부재를 잊는 '이라는, 단박에 공감되지는 않는 방법론에 의한 것, 또한 그것이 목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노을 앞에서 추는 '헝거' 또한 그렇습니다. 리듬에 맞춰 추는 것 하지만 근원적 감정은 흥이나 즐거움이 아닙니다. 내면의 배고픔을 채우고 싶어하는 욕망, 의미를 갈구하는 욕망, 그 욕망이 영원히 충족되지 않을 것을 아는 자의 비관적 몸부림 같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춤들은 결코 말로 다 설명될 수 없는 이미지를 전해 줍니다. 우리는 그 움직임을 인식하고, 그곳에서 받는 인상을 가질 뿐입니다. 어쩌면 이 춤들을 가장 잘 설명하는 방법은 그 춤을 그대로 추는 것이겠죠. 우리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인상을 받기에, 춤을 통해 무언가 근원을 건드리고 있는 감각을 느낄 뿐입니다. 그 외의 기호론적 해석의 시도들은 모두 부차적이며 주관적인 것들입니다. 




빛과 춤. 이 두 주요한 이미지는 영화의 주요한 정서를 만들어 냅니다. 


빛의 절제된 이용으로 인해 우리는 점점 버닝에 가까워지는 영화의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여기에 순간 순간 긴장감을 더해주는 음악은 고조되는 호흡을 느끼게 합니다. 만약 이 영화가 정말 스릴러만을 노린 것이라면, 후반부를 더 쪼였을 것입니다. 


또한 춤. 춤을 추는 해미의 이미지, 그리고 팬터마임을 하는 일군의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현대인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어떤 감정,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감정의 이미지를 획득합니다. 팬터마임은 서사의 흐름상 기호론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노을과 함께하는 부시맨의 춤은, 사라지고 싶은 그녀의 욕망을 가장 잘 표현해내는 이미지입니다. 어느 말과 서사로도 그러한 '영화적' 경험에 도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만 영화를 평가한다면 별 5개를 줄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는 불완전한 평가입니다. 적어도 대중영화에서는 서사의 측면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서사를 통해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를 얻고, 이미지를 통해 서사는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사실 '이미지중심적 관점' 이라는 것은 단지 영화가 시각적 / 청각적 묘사를 통해 도달하는 이미지를 분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사와의 결합을 통해 대중에게 전해지는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되어야 합니다. 서사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다음 파트에서 조망해 보겠습니다. 

 






2. 다양한 시선들 




해석의 여지가 정말 많은, 미스테리한 작품인 만큼 관객들은 정말 다양한 평을 내놓았습니다. 같은 영화를 본게 맞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영화와는 상관 없이 자신의 철학을 펴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들을 읽는 재미가 정말 (쏠쏠)


특히 왓챠에 가면 정말 여러 시선들이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건전하게 의견을 교환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또한 유튜브에서도 여러 형식의 영화리뷰 콘텐츠들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들의 '소름돋는 해석'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모든 시선들을 접해본 것은 아닐 뿐더러, 그 모든 관점을 몇 가지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제가 접한 것들을 몇 개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일단 영화의 다양한 메타포들, 무엇이 진짜인지를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스토리들을 나름대로 분석한 글들이 많습니다. 


버닝에 이르게 된 사건이 정말로 일어났는지의 진위의 검증부터, 각각의 캐릭터가 상징하는 것들,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한 수많은 분석들이 있습니다. 


모두 나름의 논리를 갖추고 있으며 의미를 강구합니다. 


누군가는 한 예술가의 탄생으로, 누군가는 이야기꾼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누군가는 '감정'과 '가능성' 에 대한 이야기로 이를 해석했습니다. 


수많은 실마리들 중 몇 개를 골라 각자의 해석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가 정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해석의 공유는 영화의 경험을 새롭게 하고, 이미지를 확장시키도 합니다. 




재밌는 것은, 이러한 해석들의 공통점이 모두 이 영화와 이창동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 즉슨 , 여러 메타포와 미쟝센을 통해 의미의 지평을 넓혔다는 것인데요. 


그것들이 어떻게 적절하게 쓰였는지에 대한 판단은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는 그것들이 세련되게 잘 쓰였다는 전제 하에 이러한 찬사들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지요. 


모호한 영화, 기호학적으로 사람들에게 분석을 요망하는 영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영화는 두뇌싸움을 좋아하는 관객들에게는 좋은 선물이자 예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또 다른 시선은 여성주의적 관점입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이 영화를 공격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유아인이 주연이라는 것, 


하나는 이창동이 캐릭터와 서사를 다루는 방식입니다. 




유아인이 나오기 때문에 그 문제적 인물에 대한 보이콧의 일환으로 영화를 보지 않고 평균 별점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소위 '별점테러'에 이른 것은, 이창동이라는 감독이 수년간 영화를 만들어 오며 보여주었던 남성주의적 시각과, 그것이 8년 만에 나온 신작에서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정당화됩니다. 


이 관점에 의하면, 여주인공 해미는 그저 벤과 종수를 중심으로 한 서사에서 소비되었을 뿐입니다. 청년을 다뤘다고 하는 영화에서 왜 해미는 단독 씬도 부여받지 못하고 소리없이 사라지냐는 것이지요. 이창동이 항상 여자주인공을 불쌍하게 바라보고, 죽임으로서 남주의 스토리를 완벽하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여성의 시선이 절반을 이뤘던 이번 칸 심사위원단이 버닝에 상을 주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서구, 백인, 남성의 시선으로 이루어졌던 주류 비평계와 시상식이 새로운 시선을 담지함으로써 , 그들의 시선에 맞는 영화가 밀려난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3) 그 외 지나치게 서사가 모호하고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로 만들어버렸다는 혹평이 있습니다. 






3. 시선들이 이루는 장 




특히 위 (1)과 (2)의 시선이 팽팽하게 맞섭니다. 


사실 (2)의 여성주의적 관점은 오늘날 어느 곳에서나 논쟁을 일으킵니다. 


일단 위의 비평들은 서로 타당성을 겨룰수는 있지만 결론적으로 무엇이 옳다 그르다는 판결할 수 없는 것이겠죠. 관점 차이라는 마법의 단어가 있으니까요. 


어느 관점을 가지느냐까지도 문제삼으며 논쟁한다면, 그것은 이미 작품을 넘어 사회에 대하여, 인식의 틀에 대하여, 정치적 입장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런 논의는 결론적으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장은 서로 날을 세우고 대치하고 있지만 


서로의 의견이 표출되는 방식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장소가 바로 영화비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고, 특히나 <버닝>같은 작품은 해석의 여지를 일부러 많이 심어두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거리, 여러 각도에서 여러 문제에  이 영화를 연관시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작품을 본 사람은 이 해석의 장에 참여하여 사람들이 어떤 토대로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왓챠에서 본 인상적인 댓글로 이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사실 비평가들은 누구보다 취향이 강한 사람들이고,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비평가들이 자신의 취향에 맞는 영화를 변호하고 대중에게 이해시키려 노력할 뿐이라고. 


그 취향의 정당성에 대해서까지 캐묻는 것은 예술의 주요한 사회적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나치게 헐뜯어서는 안 되겠죠














2000년대 극 초반의 프랑스 영화로, 제작된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영화 <아멜리에> 


국내에서 여전히 높은 인지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요인들은 :  작품의 세계적 성공, 2012년 국내에서의 재개봉, 영화음악의 명성 등. 


동화적 서사와 특유의 색감, 다양한 캐릭터 묘사, 독특한 앵글, '관객에게 말하는' 배우 등 여러 이야기할 거리들이 있는데요. 


이 글에서는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전해지는 이미지적 특징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1. 파리의 이미지 


원제는 Amelie Of Montmartre, 우리말로 하면 '몽마르트 언덕의 아멜리에' 정도 입니다. 작중 아멜리에가 펼치는 중요한 계획들 중 하나의 무대가 되는 곳이죠. 


우리나라로 하면 '남산의 아멜리에' 정도. 프랑스의 시그니처 도시 파리의 시그니처 스팟 몽마르트를 주요 장소로 하는 것입니다. 


몽마르트 외에도 이 영화는 파리의 곳곳으로 우리를 여행시켜 줍니다. 파리 전체의 전경부터 노트르담 성당, 생마르탱 운하, 돌로 된 길, 야채가게, 빌라와 엘리베이터, 지하철역, 사진 자판기 등. 


마치 파리에 바쳐진 하나의 오마주같은 작품입니다. 아시아의 어느 작은 국가에 사는 관객에게 파리란 이런 (아름다운, 독특한 등) 곳이구나! 라는 인상을 주는 영화입니다. 


우리는 아멜리에를 따라 파리 곳곳을 탐사합니다. 조금은 초록색을 입고 있긴 하지만요. 


동시에 이곳이 어떤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특징도 강조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2. 소수자의 이미지


아멜리에는 또한 '약자 이웃들의 테레사' 입니다. 스스로 그렇게 되기를 자처하죠. 영화는 또한 그런 사람의 도덕적 올바름을 추켜세우기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인이 내적으로 겪는 갈등과 불안도 커버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아멜리아는 약한 이웃들, 사회적으로 '정상'으로 분류되기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사랑합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도 독특한 사람이 되죠. 행복을 전파하기 위한 그녀의 계획들이 모두 달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아멜리아를 통해 행복을 얻게 됩니다. 


소수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영화의 주요 입장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독특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 주요 인물들에게서, 일상에서 그들을 마주했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면모들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힘은, 그러한 면모들이 우리의 인식에 보편적/무의식적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에 기여하는 것입니다. 


미셸 푸코는 사회적으로 어떻게 정상과 비정상이 분류되고, 그것이 권력의 의지에 의한 자의적 행태임을 분석했습니다. 


푸코와 '프랑스'라는 기반을 공유하는 이 영화는 푸코의 생각들을 동화로 풀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아직도 차별과 분리가 만연한 오늘날 한국사회에 이러한 이미지는 아직도 어필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극복되기 전까지는, 아멜리에는 우리 시대의 예술로 남을 수 있는 것이겠죠. 



이 영화도 조금은 스테레오타입에 기대고 있습니다. 아가사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같이, 작고 귀여운 여자가 주변의 문제들을 비범하게 해결해나가는 구조. 일종의 '요정서사'이지요. 


아멜리에 역시 작고 귀여운 탓에 강력한 액션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몰래 숨어들어가기, 조용히 소문 퍼트리기 등의 방법을 선택하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작고 귀여운 여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과잉보호를 받고 자란 탓에 얻게 된 성향이지요. 하지만 지나친 억압에 대해서는 사람들 앞에서 크게 소리지르기도 합니다. 요정서사의 탈피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이 영화의 이미지화가 사람들에게 중요한 질문들을 던져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급하게 글을 마무리해 봅니다. 



영화비평은, 영화와 대중 사이에 의미의 다리를 놓고, 대중이 미처 건너지 못한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한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저는 전적으로 이 입장에 동의하는 바인데요. 하지만 때로는 비평이 영화에 지나친 살을 붙이는 것은 아닌지, 영화에 의미의 모래주머니만 주렁주렁 매달아 


지나친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될 때도 있습니다. 


오늘 제가 데드풀에 대해 쓸 글이, 그런 일을 범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만.. . 아무튼 써 보려고 합니다. 



<데드풀2>은 재밌다 


물론 이 영화를 정말 재미없다고 느꼈던 관객들도 많은 것으로 압니다. 대중적 취향이라는 것은 확실히 존재하지만,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마블영화 전반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분명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감과 비난은 모두 정당합니다. 이 영화는 잔인하고, 상당 부분 마블 세계관에 기대고 있기에 그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전혀 재밌지 않을 수 있으며, 캐릭터가 굉장히 강해 호불호를 타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데드풀을 정말 재밌게 본 관객들도 많습니다. 제가 그 중 하나입니다. 저의 경우 영화를 통해 크게 두 가지 재미를 느끼는데요. 하나는 영화를 보며 그 상황과 대사에서 유발되는 재미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가 던져준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추후에 분석할 때의 재미입니다. 이 영화는 그 둘을 충족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기에 데드풀의 '재미' 에 대한 분석은 전적으로 저 자신이 느낀 재미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일기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작가도 자신의 배경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전문 작가가 아니지만, 하나의 대중으로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가지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일단 이 영화를 보는 도중에 느꼈던, 감상 과정 자체에서 유발된 재미의 원천은 크게 두가지 였습니다. 



(1) 데드풀의 헛소리들


: 헛소리라고 말하는 것은 열심히 쓰였을 데드풀의 대사들을 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의 장난, 과장, 디스가 뒤섞인 허구로 가득찬 말들. 어떤 상황에서도 진지해지지 않는 그의 발언들은 그를 영화 속에서나 밖에서나 개그맨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개그맨의 개그를 웃기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죠. 분명히 호불호를 띠는 헛소리들입니다. 이 헛소리들이 북미를 넘어 이쪽에서도 먹히는 현상에 대해서는 뒤에서 좀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2) 몰입을 방해하는 순간들


: 데드풀의 능력은 '제 4의 벽'을 뚫는 것이라고 하죠. 이는 그가 작품 속의 존재임을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작품이라는 벽을 넘어 감상자와 소통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뜻입니다. 영화에서도 그 설정이 그대로 유지되어, 그는 '이게 복선이다' '이제 cg 전투가 시작된다' 등 관객과 눈을 맞추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그는 라이언 레놀즈로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는 여러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원작 설정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영화와 캐릭터를 하나의 닫힌 소우주가 아닌 누구나 침투 가능한 구성물로 설정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순간들은 일차적으로 어이없음을 유발하고, 그것이 하나의 웃음 포인트가 되는 것이죠.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웃음 포인트는 (2)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발터 벤야민이라는 학자는, 영화를 다른 예술장르와 다르게 감상자와의 거리를 무화하는 매체라고 정의했습니다. 영화를 보며, 그 속에 깊이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캐릭터와 공명하고, 서사를 따라가는 경험을 모두 해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영화의 힘이고, 영화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데드풀>은, 그러한 감상 방식을 방해합니다. 관객들에게 끊임없이 그들이 무언가를 '감상'하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또한 그것이 어떤 전통적, 관습적인 공식을 따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러한 개입과 방해가 재밌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감상의 흐름을 방해당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일차적인 이유는, 새롭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시도가 처음은 아니지만 분명히 독특하고 많이 시도되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관객은 일정 부분 새로움을 느끼고, 참신함에서 즐거움을 느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그것이 복선이고 이것이 cg인 것을 관객이 모르는 바가 아니죠. 이미 공식화된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한번 더 짚어 줌으로써, 유머의 한 종류인 셀프디스에서 느껴지는 재미와 비슷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좀 더 들어가 보면, <데드풀>은 스스로 관객과의 거리를 조절합니다. 영화와의 거리를 조절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었습니다. 그러나 데드풀은 끊임없이 자신에 대해 , 영화에 대해 설명하고 관객을 서사에서 밀어내고 당기기를 반복합니다. 우리에게 영화를 본다는 것, 영화관에서 제작비가 많이 들어간 할리우드 히어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일상적이고 관습적인 행위일지도 모릅니다.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점령한 영화를 보는 것은 빠질 수 없는 데이트 코스이며 가족의 외출이죠(<데드풀>은 19금이긴 하지만). 이런 반성 없는 행위인 영화감상을 새로운 것으로 만들게 한다는 점에 데드풀의 독특함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은 다른 영화의 감상과 완전히 다른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느껴지는 재미가 이 영화의 다른 문제점을 덮는 것은 아닙니다. 쉴새없이 욕을 뱉어내고 마블의 세계관의 장악을 강화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어떤 사람에게는 <데드풀>이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지루하게 했다는 점에서, 허무맹랑한 주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너무나 대중적이고 어쩌면 진부한 스토리라인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 시사점을 던져준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 히어로영화와 가상의 세계 - 마블 시리즈를 비슷한 오늘날 SF영화, 히어로 영화들은 화려한 CG를 바탕으로 마치 진짜 건물이 무너지고 세계가 조각나는 듯한 연출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교한 연출, 마치 현실처럼 믿게 만드는 연출은 아이맥스와  4D 등 기술에 의해 관객에게 더욱 생생하게 전달됩니다. 우리는 가상을 현실처럼 즐기기를 원합니다. 영화는 그러한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기 위해 많은 자본과 기술을 투자합니다. (그만큼 거하게 망할 확률도 높아지지만요) 점점 더 높아져가는 대중의 눈, 그리고 그것에 부합하는 결과물은 대중에게서 '영상미'라는 찬사를 받으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데드풀>은 , 관객에게 '당신들이 보고 있는 것은 대부분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 전형적 서사를 따르고 있는 히어로영화다' 라고 말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알려줍니다. 그러한 포맷에 대한 비판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영화가 대중에게 그것을 스스로 말한 것은 최초는 아니더라도 처음에 가까운 시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여기서 대중은, 히어로영화와 가상의 세계를 어디까지, 언제까지 지금처럼 감상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 웃음코드에 대하여 : 어느 문화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을 배꼽 빠지게 웃게 하는 것들이 다른 문화권에서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들이 있죠. 인간은 문화적 동물로, 기본적으로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의미의 그물 속에서 사고합니다. 그런데 <데드풀>의 많은 대사가 한국인을 웃게 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형성된 유머코드가 세계적으로 동질화되고 있음의 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도르노가 문화산업의 '동일화'에 대해 지적한 이래로, 문화산업으로서의 영화의 힘은 점점 커져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웃음의 기준이 동질화되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많은 코드와 담론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무튼 <데드풀2>는 히어로물의 공식을 뒤집는 기념비적 작품으로 등극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아무도 죽지 않고 악은 파괴되고 가족, 의리..그런 것들이 승리하는 히어로물의 공식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 제 4의 벽을 깨는 능력을 가진 이 히어로는 (의도했든 의도되지 않았든) 오늘날의 영화감상이라는 '관습' 에 대해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줌으로서 감상에 새로운 리듬을 부여했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시도이고 의미있는 도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데드풀 쓰리 나왔으면 좋겠어요. 데드풀 사랑해요. 










<땐뽀걸즈>(2016)  - 이승문 감독. 다큐멘터리


거제여상.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의 댄스스포츠 동아리 학생들과 가족들, 그리고 담당교사 이규호 선생님의 삶과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상상마당 배급으로 많은 대중이 접할 수 있었고, 그에 따라 많은 호평도 받았던 작품입니다.

네이버영화 관람객 9점대 평점을 유지하고 있는 이 다큐멘터리, 

평가들을 키워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모든 관객들의 의견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1. '따뜻한', '아름다운' '추억'

2. '조명받지 못한, 치열한 삶'

3. 남성/어른의 시선으로 재단되지 않은 여고생들.

4. 거제의 지역적 특성과 삶의 연관

 

1. '추억'  -   '(댄스스포츠가) 아줌마 되면 언젠가 생각 안 나겠나' 라는 이규호선생님의 말은, 그가 학생들에게 추억을 선물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때 '추억' 이라는 키워드는 영화를 보고 학창시절, 은사님 등을 떠올린 사람들의 감정, 어린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함축합니다. 이는 '학창시절' 이라는 어른들의 기억의 전유물을 다룬 영화를 통해 쉽게 촉발되는 반응입니다.

또한 이 키워드는 관객들 각각의 구체적인 추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학생들의 삶에 연민을 느끼고, 이규호선생님이 그들에게 '추억'을 선물한다는 말에, 그리고 그들에게 정말 땐뽀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믿음, 그 일련의 서사에서 느껴지는 감정입니다. 

후자의 반응은 이 영화의 다큐멘터리라는 존재론적 지위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메시지,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꾸며낸 서사가 아닌 이들이 실존한다는 믿음입니다. 이는 관객들로 하여금 더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합니다. 내가 보는 배우가 마스크가 아닌 정말 그 사람이니까요. 영화가 하나의 세계, 소우주가 아닌 우리 세계의 다른 곳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따라서 '추억' 으로 대표되는 감정은 그것이 다큐멘터리일수록 증폭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2. '조명받지 못한, 치열한 삶'


또한 많은 사람들이 조명받지 못했던 , 그러나 치열하게 살고 있는 삶을 드러낸 이 영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사람들의 삶이 영화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는 것이죠. 이는 <땐뽀걸즈>에 국한되지 않으며 정말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평가입니다.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 이러한 평가가 다큐멘터리로서는 아주 고마운 이야기이지만, 영화로서는 부족한 성취라는 것입니다. 조명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인정받게 하는 것은 매일매일 티비에서 방영하는 다큐멘터리들이 열심히 하고 있는 일이지요. 다큐멘터리 영화를 영화로서 평가하고자 할 때는, 조명받지 못한 삶을 다룬다는 것은 '잘한 것' 이 아니라 어쩌면 '당연한 것' 입니다. 그것이 어떤 앵글, 어떤 쇼트, 편집을 통해 이미지화되었는지에 주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3. 남성/어른의 시선으로 재단되지 않은 여고생들


시사적인 지적입니다. 남성의 시선, 그것의 재현에 대한 경계심이 한국사회에서 최고조로 높은 오늘날이기에 이 다큐멘터리는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가 가진 강력한 능력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시선으로 연출되지 않은, 또는 최소한으로 연출된 '주체'들. 다큐멘터리는 대중영화가 끊임없이 주입하는 반성 없는 특정 집단의 이미지화에 대항하기 위한 좋은 수단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4. 거제의 지역적 특성과 삶의 연관


영화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제 조선소의 스카이 샷. 맑은 하늘을 뚫을 듯 솟아있는 거대한 크레인과 장비들이 즐비한 조선소 부지는, 마치 신축 아파트를 홍보하는 영상, 또는 활발하게 개발되고 있는 신도시의 홍보 영상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이 조선소는 배를 만들고 있지 않습니다. 기계들은 움직이지 않고 인부들도 없습니다. 조선소에서 일했던 땐뽀반 학생의 아버지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 서울로 떠나게 됩니다.

위풍당당한 조선소의 모습은 땐뽀반 학생들, 그리고 가족들의 삶과 적절한 대비를 이룹니다. 선생님의 텃밭과 조선소의 기계들. 갈등도 겪고 행복도 맛보는 사람의 삶과 항상 같은 모습으로 굳어 있는 크레인들. 쇠락한 조선산업과 그로 인한 지역 주민들의 삶이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영화는 인물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보여주지는 않습니다만, 거제의 현 상황을 알고 있다면 이 이미지들은 충분히 강력한 영향을 발휘합니다. 





이처럼 대중은 여러 반응을 보입니다. 이를 나열한 이유는, 이 작품의 존재론적 지위와 감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란 무엇일까요? 다큐멘터리일까요, 영화일까요? 그 둘은 구분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이것은 예술일까요?

보편적인 도식에 의하면 이 작품은 영화 중에서도 다큐멘터리일 것이고, 영화는 예술의 한 종류입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예술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을 바라볼 때는 어느 관점에 입각해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이런 문제에 대해 관객으로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이미지로 소통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 예술의 지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예술의 지위를 가집니다. 

그리하여 이 작품을 예술로서 대하면 어떤 이미지가 어떻게 표현되었는지, 그 속성에 집중할 것입니다. 

위의 반응 중에서는, 크레인을 담은 스카이 샷과 아이들의 웃고 떠드는 모습이 어떻게 대비되면서 어떤 인상을 남기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오늘날의 사회 속에서 특정 지위와 특정 공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얼마나 왜곡 없이, 시의적으로 잘 보여주는지에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이 작품은 한 편의 완결된 영화로서 대중에게 주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화로서의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로서의 영화로 이 작품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평은 관객과 영화 사이 간극에 제대로 다리를 놓아줄 수 있을 것입니다. 





<닥터 스트레인지> (Doctor Strange, 2016)

 

개봉한지 2년이 되어가는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냥 제가 최근에서야 봤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여러가지 할얘기들이 많은, 흥미로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자라지만 한번 풀어나가 보겠습니다. 



대중의 반응은 대부분 '영상미'가 뛰어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토리와 캐릭터에 대한 호평들도 많았지만, 대체로 화려한 CG, 영상미가 '모든 것을 씹어먹는다'(네이버 영화 prsi****)는 류의 평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빈약한 스토리라인에도 불구하고'(네이버 영화 평점) 관람객평점이 8점을 넘어서게 한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시각 디자인'(한 평론가)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적 상상력의 공간을 실물로 옮겨낸 그래픽의 힘은 사람들에게 영상미를 경험하게 합니다.




 '영상미'


 관객들은 영상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다른 비판점에도 '불구하고' 영상이 아름답기에 볼 만 하다며 높은 평점을 주곤 합니다. 일상적인 용어가 되어버린 이 영상미란 대체 무엇일까요?

 영상미에 대해 파고들자면 가장 먼저 마주해야할 문제는 '미' ,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저도 공부가 부족한 터라 깊이 들어갈 수는 없지만, 옛부터 철학자들른 이 단어의 지나친 주관성에 의문과 염려를 품으며 많은 연구를 진행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학의 한 영역입니다. 아무튼 여러 천재들이 미에 대한 다양한 기준들을 제시해 왔지만 오늘날에도 아름답다는 말은 극도로 주관적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릅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다.

 오늘날 이야기되는 영상미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영화, 어떤 영상을 영상미가 뛰어나다고 하는가?" 라는 질문에 명확히 답을 주기란 하기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다른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관객이 말하는 영상미란 무엇일까요? 




'영상미로 유명한 영화'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저에게 먼저 떠오른 것은 데미안 셔젤 감독의 <라라랜드> 입니다. 할리우드의 여러 풍경과 원색적 색채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노란 드레스와 남청색의 해질녘, 푸른 물, 그리고 city of stars~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이때의 영상미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의 영상미와는 조금 다릅니다. 라라랜드가 만들어낸 영상미는 색채와 음악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닥터>에서 관객들이 이야기하는 영상미는 기술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법에 관한 만화적 상상력이, 마치 현실처럼, 사람들의 눈 앞에 펼쳐지게 만드는 컴퓨터그래픽의 힘에 많은 사람들이 놀란 것 같습니다.

이렇게 영상미는 회화적인 인상이나 사진의 아름다운 구도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에서만 느껴지는것이 아닙니다. 사진과 회화의 연장선에서 벗어나, 움직이는 영상에서만 관찰할 수 있는 것들이 영상미가 되었습니다.(사실 단어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함께 재생되는 음성도 포함될 것입니다. 음악을 비롯한 사운드효과는 관객의 경험을 증폭시키기 마련입니다.

관객들이 영상미에 환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캐릭터 묘사와 일정한 텍스트, 그리고 편집을 통해 특정한 주장을 하고 있는 영화에 대해, 그 다른 모든 요소들을 배제하고서라도 영상미 때문에 훌륭한 영화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주 다방면의 접근이 필요한 복잡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짧게나마 제 생각을 적어보자면, 


(1) 대중문화로서의 영화와 '예술'관의 연관성 : '미' 만큼이나 '예술' 역시 모호하고 논쟁적인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 예술인지 아닌지, 아름다운지 아닌지에 대한 격한 토론을 벌이곤 합니다. 그러한 논쟁성 자체가 예술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논쟁적이든 어쩌든 '예술'은 아직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분류적 의미와 평가적 의미가 완전히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즉, 어떤 대상을 예술이라고 명하는 순간 그 대상의 가치와 그것을 전유하는 사람들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담지하고 있다는 생각. 이것은 단지 대상을 분류하려는 분류적 의미와 대상에 대한 가치판단이 포함된 평가적 의미가 예술이라는 단어에서 구분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대형 영화관 스크린을 몇 개씩 차지하는 영화들의 경우는 어떨까요. 일단 이 작품들은 모두 '영화'입니다. 영화가 발달한 초창기에, 이것을 사진이나 회화, 문학처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대우'하려는 많은 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영화예술가'로 불린 작품들이 만든 영화들은 오늘날도 그 의미와 영상의 가치가 회자되곤 합니다. 그런데 모든 영화가 예술일까요? 판에 박힌 스토리라인이 반복되고 단지 돈을 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가 쓰인다면, 그것은 예술로서 취급받으며 사람들의 분석을 유도하는 대상이 되기에 자격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예술에 대한 다양한 정의들을 접한 후에야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중들의 머리 속에 성립된 '영화=예술'의 공식은 (그것을 폄하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꽤 굳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느껴지는 영상미가 영화를 평가할 때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술=아름다움'의 공식 역시, 아직은 깨기 어려운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2) 이미지에 대한 갈구 : 오늘날 우리는 이미지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때 이미지란, 사람들의 머리 속에 그려지는 '상(像)' 이 아니라, jpg, png 파일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술의 발달로 이미지의 제작, 교환, 전송이 용이해진 오늘날 사람들은 글을 찾지 않습니다. 사진이나 그림 없는 글은 잘 읽히지 않습니다. 뉴스도 점점 이미지가 핵심이 되었습니다. 한번에 읽기 편한 카드뉴스 형태가 보편적인 것이 되었죠. 우리는 이제 이미지에 익숙하고, 지속적으로 이미지가 공급되기를 원합니다. 이때, 고자본 고기술이 투입되는 오늘날의 영화산업에서의 결과물은 가장 첨단을 달리는 이미지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돈을 내고 최고의, 최신의 이미지를 사는 것입니다. (또는 예술을 소비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기도 합니다) 때문에 뛰어난 영상미, 즉 화려한 앵글과 CG는 영화를 보는 목적에 부합합니다. 그래서 영화를 평가하는데 우선적인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닥터>는 대중들에게 영상미로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2016년의 관객들은 꽤나 놀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놀랄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공간이 뒤틀리고 조각나고 차원이 나뉘는 만화적 상상이 눈앞에서 실제 상황처럼 펼쳐졌으니까요. 만화를 보면서 '그것이 현실에서는 어떨까?' 라고 상상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잘 만들어진 상상, 또한 어느 관객평에 의하면 '갈려나간 그래픽디자이너'들에 의해 우리 눈 앞에 제공되니까요. 그리고 마치 그 잘 만들어진 세계 속에 있는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효과까지. 그런데 어느 평론가는 이 영화가 여러 편의 영화들을 떠올린다고 평가했습니다.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그래픽이라는 것이지요. 이제 히어로물/SF영화들이 나아가야 할 곳은, 아무도 시도한 적이 없는 컴퓨터그래픽의 영역이 된 것일까요. 서사의 매끄러움과 시사성은 아무래도 상관 없게 되었습니다. 아니면, 영화가 아무리 특정 인물형과 사회를 비판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대중의 예리함이 작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상미 뒤에 가려진 것


우리는 이 모든 영상미 뒤에 가려진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한 관객은 '오리엔탈리즘과 화이트워싱을 영상미가 모두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영화를 보시오'라고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핵심 인물 중 한명인 에이전트 원은 만화원작에서 동양인이었으나, 영화에서는 백인 배우가 연기합니다. 일종의 문화적 전용의 문제가 제기된 것입니다. 마법의 중심지인 '네팔 카마르-타지'의 가장 강력한 중심 인물 자리에 서양인을 꽂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동양인들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같이 인종적 문제가 민감한 시대에 MCU가 그것을 고려하지 않았을리는 없지요. 캐릭터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연기력과 전달력이 보장된 배우를 선택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는 확실히 '주술적(비과학적)이고 신비한 동양'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술이 아닌 첨단 의학으로 사람을 정확하게 살려내는 의사가, 의술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하는 주술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 찾아간 동양 네팔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을 마주하는 백인들의 자세 또한 정확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과학에 대한 맹신과 오만함, 비과학적인 모든 것에 대한 조소로 무장한 인물을 대표합니다. 'Magic'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느냐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러나 곧 마술의 엄청난 힘을 알게 되고 수련에 정진하여 마법으로 세상을 지킬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MCU의 태도는 , 이 모든 것을 웃고 넘어가자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리엔탈리즘이고 마술이고 다 말도 안되는 거 어짜피 다 아니까, 그런 세계라고 생각하고 웃고 넘어가보자는 나름의 유머. 그러니까 동양에 대한 일반화, 문화적 전용이 자신들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마블 원작이 해낸 것이고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영화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MCU의 역할은 사람들을 웃게 하는 것, 즐거움의 세계에 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임은 알고 있다는 듯 약간의 해학을 담았습니다. 

문제는 이 세계관의 엄청난 영향력입니다. 시대의 히어로물을 필요로 하는 현대인에게, 지금의 헤게모니는 마블이 쥐고 있습니다. 엄청난 수입과 또 그 투자로 이뤄낸 화려한 '영상미'의 영화는, 동양인에 대한 희화화와 고정관념을 가리게 됩니다. 뭐가 됐든 마블은 화려하고 닥터스트레인지는 대단하니 된 것이지요. 히어로들이 모두 백인인 것을 비판하기에 조금은 어려운 것은, 마블의 세계를 일군 것도 백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황인'들이 사는 동양을 입맛대로 그려내도록 그냥 둘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들이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말입니다. 

 

나가며


따라서 우리는 대중영화가 '영상미'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즐기면서도, 비판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영상이 주는 도취의 순간 뒤에 남게 되는, 조용히 묻혀버리는 서사들에 대해 비평의 칼을 세우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순간에 그래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비평은 영화와 대중 간의 거리를 채워주는 글쓰기입니다. 전혀 간격이 없는 영화도 있다고 합니다만, 대중이 빠르게 변화하기에 그 간격은 언젠가는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문화적 슈퍼파워 MCU의 작품들을 주시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