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모코는 항상 프릴 달린 원피스를 입는다. 

1. 사회의 암적인 존재 혹은 벌레취급을 받는 아웃사이더의 내면을 대변하다.  

18세기 유럽의 '로코코' 풍을 지향하는 여고생 모모코. 모모코는 쾌락과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화려한 그 시대에 태어나고 싶었다. 모모코의 몸과 마음은 모모코가 사는 시골 마을(시모츠마)에 있지 않다. 도쿄의 디자이너샵에서 산 비싼 프릴 원피스만 입는다. 머리장식과 가방, 양산도 완벽하게 매치한다. 항상 혼자 다니며 달콤하고 예쁜 음식만 먹는다. 학교에선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고 체육시간에 참여하지 않는다. 혼자 걸으며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상상을 자주 한다. 

은근 세상에 이런 사람 많다. 그러니까 자신만의 세계에 꽂혀 사는 사람들. 웬만하면 관계맺지 않는다. 왜 자기 취향을 드러내는걸 두려워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이 자신만의 이상 혹은 공상을 갖고 살아가겠지만 그걸 드러내는건 쉽지 않다. 하지만 모모코 부류의 인간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사회성 없다고, 공동체에 도움되지 않는다고 비난받는다. 손가락질 당한다. 

그런데 손가락질하는 그 다수는 모모코보다 더 나은 인간인가? 모모코의 시선과 내면의 소리를 좇는 이 영화는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모모코는 행복이 뭔지 안다. 본인이 무엇을 할때 행복해지는지 안다. 어린 나이이지만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에 집중할 줄 안다. 행복을 붙잡는 것이 어렵다는 것도 안다. 커서 뭐가 될거냐는 친구의 물음에 "글쎄, 노동은 취미와 맞지 않아서" 라고 (한심한,,) 대답을 하지만, 본인이 잘 하는 일(자수 놓기)을 통해 당당히 돈을 벌기도 한다.

반면 자신의 내면은 방치해둔 채 사회가 정해준 기준에 맞춰 사느라 삽질하는 사람들은 어떤가?(바로 나) 한번이라도 내면의 소리, 내가 무엇을 할때 진정 행복해지는지 생각해본 적 있나? 나같은 사람이 모모코류의 사람들보다 생산활동에 조금 더 참여하고 조금 더 번다고 해서 모모코류의 사람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래선 안된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이치코는 여고생 폭주족이다. 

2. 하지만 아웃사이더에게도 관계맺음이 가능하다. 친구라는 존재는 아웃사이더가 몰랐던 행복을 알려준다. 

모모코에게 이치코라는 친구가 나타난다. 까만 립스틱에 발목까지 오는 치마. 화려한 스쿠터를 타고 담배를 핀다. 모모코만큼이나 비주얼이 과하다. 이치코는 매일 모모코를 찾아온다.  모모코의 아싸 기질이 본인과 통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둘의 차이가 있다. 모모코는 본인이 동경하는 세상이 현실(2000년대 초반 일본)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아싸가 됐다. 즉 주어진 환경이 로코코였다면 모모코는 아마 인싸였겠지. 하지만 이치코는 주어진 세상에 반항하는 방식으로 아싸가 되었다. 로코코에서 태어났어도 이치코는 아싸다. 

그래서 모모코에겐 중심이 있다. 표정 변화도 감정 동요도 없다. 길을 걸을 땐 항상 똑바로 간다. 묻는 말에만 대답한다. 반면 이치코는 흔들린다. 정신없고 불안하다. 감정기복이 심하고 요란하게 스쿠터를 탄다. 불안하고 외로운 이치코는 친구를 원하기 때문에 모모코에게 매달린다. 같이 있고 싶어하고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한다. 

결국 엔딩에서 모모코는 이치코와의 함께한 사건 후에 진짜 시원한 미소를 보여준다. 잇몸을 다 드러낸 상쾌한 웃음을 짓는다. 그러니까 자기 세계만 보고 사는 아웃사이더에게도 관계맺음이란, 친구란 불가능하지 않은 거다.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존재와 관계맺음으로써 자기만의 행복의 정의에 없었던 새로운 행복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Bonnie and Clyde>. 1967. 

한글 제목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감독 아서 펜(Arthur Penn). 주연 페이 더너웨이( Faye Dunaway), 워런 비티(Warren Beatty)


아래 글은 로저 에버트(Roger Ebert)의 영화 개봉 당시 리뷰를 번역한 것입니다(1967. 9. 25 작성).


(원문 : https://www.rogerebert.com/reviews/bonnie-and-clyde-1967)




<Bonnie and Clyde>(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진실과 천재성으로 만들어진 작품, 미국영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영화는 무자비하게 잔인하고, 연민으로 가득하며, 구역질나고, 흥미로우며, 가슴 아프고, 또한 놀랍도록 아름답다. 형용사들이 한데 묶이는 것이 모순으로 보인다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한 작품 안에서 인간 삶을 총제적으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클라이드 배로(워런 비티 역)와 보니 파커(페이 더너웨이 역)가 그 '인간 삶'을 대표한다. 이들은 은행강도와 살인으로 신문에 얼굴을 싣는 양아치다. 은행을 터는데는 소질이 없으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하며, 신문 등장하는 것에는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보니는 씹는 식당 종업원이었고, 클라이드는 가석방중인 하찮은 깡패였다. 그런데 이들은 예능인이기도 하다. 범죄자로 이름을 날린  보니는 클라이드와 함께 찍은 사진을 자작시 함께 언론에 보낸다. 자신들을 대공황 시기 암울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의 통쾌함을 선사하는 공인으로 생각한다. 


"굿 애프터눈, 배로 갱이다(Barrow Gang, 보니와 클라이드의 강도단)" 클라이드는 은행에 들어서며 인사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니와 클라이드는, 미국 역사상 이뤄졌던 모든 폭력들을 종합하여 대중매체에 터뜨려준 선구자라고도 있겠다.


아서 (Arthur Penn) 감독한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똑바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겨냥한다. 영화는 명백하게 오락을 목적으로 대중영화이고, 관객은 분명 그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어린 커플들은 <특공대작전(The Dirty Dozen)>(1967), <타고난 패배자(The Born Losers)>(1967), <지옥의 천사(Hells Angels on Wheels)>(1967) -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개봉 당시 미국 10 사이에서 유행했던 B급영화들 -  대하는 것처럼  작품을 보며 영화관 데이트를 즐길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보통의 B 영화들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대부분의 미국영화에서 폭력 장면은 이상하리만치 피를 흘리지 않는다(현실성이 없다).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지만, 고통스러워 하지 않는다. 살인 장면은 영화 구성에서 내키지 않아도 다뤄져야 요소 같은 것이 되어, 관객들은 그래야 표값을 한다고 생각한다. 섹스신도 마찬가지다. 마치 과자봉지 장난감 같은 것이다. 전혀 쓸모가 없는데도 혹시나 들어있지 않으면 사람들은 사기당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에서는 진짜 사람들이 죽는다. 사람들은 죽기 직전 소름끼치게 괴로워한다. 사람들은 괴로워하기 직전 웃고, 체스를 두고, 사랑을 나눈다. 영화 속 희생자들은 우리가 아는 평범한 주변인들이 되고, 그들이 죽을 때, 객석에서는 전혀 편안함을 느낄 수가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을 , 그들은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난다. 충격적이다. 만화 <Fearless Fosdick>에서의 묘사처럼, 총알은 사람의 몸에 깨끗한 치즈 구멍 같은걸 남기는게 아니다. 총알은 실제로 사람의 살을 찢고 뼈를 뚫는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살인의열풍시대에 살고 있다. 연쇄살인마 리처드 스펙(Richard Speck, 1966 7 13일과 14일에 8명의 견습 간호사들을 고문, 강간, 살해) 포스터가 팔리고, 뉴아크 소요(Newark Riot, 1967년 뉴아크 백인 경찰의 지나친 흑인 진압에 대한 시위) 당시 경찰 스나이퍼들이 라이프(Life magazine) 표지에 실린다. 폭력은 비인간적인 자질을 요구하게 되었다. 배로 갱은 스크랩한 신문의 구절을 재밌다는 듯이 크게 읽는다. 갱단의 일원인 모스가 총상을 입은 보니와 클라이드를 아버지 집에 데려갔을 , 아버지얘네가 위해 해줬냐? 신문에 넌 이름도 나왔어라고 조소한다. 이것은 유머인가, 비극인가? 


흠잡을 없는 연기. 페이 더너웨이 워렌 비티 이 작품에서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주연급으로 자리잡았다. 갱단의 드라이버이자 수리공인 C.W 모스 역을 맡은 마이클 폴라드는 사람좋은 바보의 유머와, 진실된 감정연기를 선보인다. 보니가우린 은행을 털어라며 갱단을 소개하고 그를 동료로 들이려  , 모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표정과 몸의 움직임은 완벽하고도 기분 좋은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또다른 멤버들 배로(Gene Hackman 핵맨, 클라이드 배로의 ) 블랑쉬 배로(Estelle Parsons에스텔 파슨스) 부부는 엉성하고, 단순하며, 선량하기까지 하다. 벅과 클라이드가 재회하는 장면에서, 그들은 오랜만에 만났지만 딱히 말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얼싸안고 장난스럽게 주먹질을 주고받는다. 경찰의 함정에 걸려 갱단이 총격을 받고 벅이 거의 죽음에 이르렀을 , 블랑쉬는 도주하는 갱단의 안에서 미친 듯이 높게 울어 제낀다. 이는 나에게 지옥의 적확한 묘사로 느껴진다. 


이것은 단연코 올해(1967) 전미 최고의 영화이다. 또한, 기념비적이기도 하다. 후에 분명히 영화는 1960년대의 슬픔과 유머, 그리고 공동체가 겪어온 것들을 낱낱이 보여주는 최고의 영화로 자리잡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이 1930년대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영화는 어느 시점이든 선택할 있고, 중요한 것은 지금의 우리에 대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노트북>(The Notebook, 2004) 감독 닉 카사베츠, 주연 라이언 고슬링 레이첼 맥아담스 

"What do you want! what do you want! what do you want !?! god damn what do you want?!"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여러 명장면을 남긴 로맨스영화. 연인이 함께 보기 좋은/시간때우기 좋은 영화목록에 꼭 포함되는 반열에 올랐습니다. 


관람객들의 반응은 대체로 극과극입니다. 

한 편에는 첫사랑의 기억, 진정한 사랑을 담아낸 '인생영화'로 꼽는 사람들이, 

한 편에는 도저히 주인공들에게 이입할 수 없으며, 이를 행복한 사랑으로 그려낼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좀 더 전문적인 영역인 비평가들의 평가는 이 영화의 명성에 비해 많지 않습니다. 

대중소설을 원작으로 한 대중적 영화라 평론가들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도 작용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한 평론가는 이 영화의 전형적 '신파'와 그 신파로 인해 영화의 '바이블'로서의 위치가 굳어진다는 짧은 평을 내렸습니다. 



관객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곳은 크게 두 가지, 등장인물들 각각의 입장과 영화가 그려내는 '첫사랑'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입니다. 

평론가가 주목한 것은 '전형적 신파'로 , 바꿔 말하면 '서사'의 문제입니다.

관객들이 작품의 텍스트에 주목했다면, 평론가는 로맨스영화라는 장르에서 이 영화의 위치를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일반적인 관객/비평가의 감상태도입니다) 

이 두 가지 일반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정말 많지만, 이 글에서는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서사' 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서사에 대한 이해가 있을 때, 관객들이 작품 자체의 텍스트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더 다층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중영화에서의 서사란 필연적으로 그 시점 대중들의 의식, 관념, 문화 등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서사'


영어로는 내러티브(narrative). 일반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는 완결된 하나의 스토리, 또는 흐름을 지칭합니다. 

이는 아주 특수한 경우부터 보편적인 경우를 모두 포괄합니다. 

특수한 경우라면 '<매트릭스>의 서사구조' 와 같은 예시로 쓰이고, 

보편적인 경우라면 tv드라마에서 자주 발견되는 '신데렐라 서사'와 같은 경우가 있겠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좀 다른 의미와 무게로 쓰이는 단어이지만 이 글에서는 위 정도의 의미를 가져가도 좋을 것 같습니다.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서사를 보면, 우리는 일단 소설이라는 아주 오래된 문학 장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영화보다 훨씬 그 역사가 긴 소설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발전되어 왔는데요, 

이 과정 속에 크게는 '비극' '희극' '로맨스서사' '영웅서사' 부터 '신데렐라서사' 까지 다양한 서사들이 존재합니다.

같은 서사를 가진 것으로 판명된 작품들은 비슷한 사건의 흐름 구조, 비슷한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화'라는 것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모든 이야기들의 모티브, 원형이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인데요. 

어떤 입장에서는 이 모든 서사들을 낳은 원형이 신화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20세기,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19세기 말 영상기술의 발견 이후 많은 창의적인 사람들이 이 기술을 통해 여러가지 표현을 시도했고, 많은 똑똑한 사람들은 영화의 존재론적 의미와 예술로서의 지위에 대해 논쟁했습니다.

영화를 완전히 새로운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은 영화가 다른 기존 장르들과 공유하는 매체와 절차들입니다. 

음악이 그러하듯 소리를 가지고 있으며, 연극이 그러하듯 연기와 배우를 필요로 하고, 회화가 그러하듯 시각적 구성이 필수적입니다. 무엇보다도, 소설이 그러하듯 스토리를 가집니다. 

때문에 영화 역시 '말'과 '글'로 표현될 수 있는 서사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영화의 역사가 짧다고 해서 영화서사의 역사가 짧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물론 영화 자체의 흐름은 소설의 흐름보다 훨씬 빠르지만, 기본적으로 극영화를 위해서는 글로 쓰인 스토리가 필요하기에, 그것은 소설이 구축해 온 서사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장르와 서사를 연결해서 생각하는 분석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비평과 영화의 위치 


사람들은 원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길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플랫폼의 발전으로 더욱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영화만을 위한 어플리케이션/사이트 이뤄지는 짧고 긴 평가들, 유튜브를 통해 이뤄지는 분석 등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훨씬 대중적으로 읽히는 것은 단연 동영상컨텐츠입니다. 

수많은 '영화 리뷰 유튜버' 들이 영화를 분석하고 심지어 중요장면만 편집하여 결말까지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하고 있는 비평은 텍스트분석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즉 작품 자체만 바라보며 등장인물과 미쟝센의 의미를 분석하고 사람들에게 나름의 추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텍스트분석은 분명 중요한 비평이고, 그를 바탕으로 더 넓은 담론을 펼쳐갈 수 있는 기초가 됩니다. 

하지만 이것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영화 자체 텍스트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영화를 보고있는 관객들이 처한 담론적 시대적 상황, 영화가 몸담고 있는 장르나 어떤 카테고리 등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더 넓은 카테고리' 중 하나가, 영화가 담지하는 특정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플롯이 매우 독창적이지 않다면 영화는 일정 서사에 기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서사를 전복하거나, 그 서사를 조금 비틀거나, 서사에 기대어 흥행을 노리기도 합니다. 

( 서사와 병치되는 카테고리들 중 하나는 영화의 민족성입니다. 한 영화가 어느 국가, 어느 감독, 어느 나라의 장소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 등입니다 ) 



'전형적 신파'


이때 어느 평론가가 <노트북>에 대해 이야기한 '전형적 신파'가 다시 떠오릅니다. 

신파라는 단어는 매우 포괄적이지만 이 또한 하나의 서사입니다. 웃음과 눈물을 짜내는 서사..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전형적 신파들, 그 중에서도 남녀관계를 다룬 영화들에서 <노트북>이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고, 어째서 이 영화가 그 중에서도 '바이블'의 입지를 점유하게 되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서사들에 대한 파악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여러 서사들을 담은 아카이브를 구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입니다) 










 










<노트북>

  •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 평론가. 
  • 사랑이 어떻게 변하나? 문제. 
  • 이것은 사랑론인 동시에 영화 서사의 문제? 
  • 이런 장르에서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 전형적 캐릭터를 쓰는 것의 문제. 소설에서 영화로. 


소설원작영화 


소설, 서사, 내러티브 : 문학론에서 어떤 개념화가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서사의 역사는 길다. ‘신화라는 원형도 존재한다. 


이때 영화는? 역시 서사를 가지나 역사는 짧다. 작품 한정적인 서사. 


작품을 평가할 , 영화가 몸담은 어느 줄기들/카테고리들을 떼어놓고 생각할 있을까? > 텍스트적 분석에 그치는


그러나 비평은 암호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비평은 예술에게 일정한 역할, 진보를 요구하고 따라서 그들이 몸담고 있는 것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 그래서 <노트북> 대해서는 어떤 접근이 가능한가? ? ? 

  • 로맨스서사 / 할리우드영화 / 감독작품 / 소설원작 
  • 여기서 어떤 진보를 꾀해야 하는가? , 전통과 어떤 연관을 맺고 나아가야 하는 걸까? ... 
  • 전통과의 연관, (사론?) 에서 장르들 (소설 , 영화...) 등이 맺어야 하는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른 걸까? 

로맨스서사 - 너무나 방대한서사.. 다양한종류와 다양한인물 젠더문제 계급문제등등등등등등등

또한 필수요소이기도 하다 어떤장르이든 흥행필수요소? 처럼 여겨지는 .. 

아무튼 이런 필수요소가 장르적 중심이 : 영화의 분위기. 이미지 형성 ..